“두발” 자유화한다고 좋은가? 단정하다고 나쁜가?
“두발”이라는 것이 미디어 뉴스의 오늘의 태그라서 한마디 해보고자 한다.
학생들의 “두발자유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흔히 학생시절에 많은 규제를 가하는 것은 절제의 도리를 배워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외형적 성인 유무판단은 머리카락의 길이로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단 머리카락 길이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얼굴의 모습에서 상대방 사람이 학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머리를 길게 하고 키도 어느 정도 다 자라고 목소리도 변성이 돼서 어른스러우면 외형적으로 과연 고등학생이라고 판단하겠는가?
두발을 자유화 시키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아직 절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학생들이 두발이 주는 외형적 가치에 그 다음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무엇이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길거리에서 키 170센치 이상 큰 청년이 그것도 머리도 길고, 목소리도 이미 변성기를 지나
어른스런 목소리에 아무리 봐도 청년인 사람이 다가와 담뱃불을 빌리자고 하면 상대방 나이와 비슷한 사람이면 누구나 불을 빌려주게 된다.
그 사람이 학생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결국 두발자유화 다음으로 자유화 되는 것은 학생들의 성인 행동이 아니겠는가?
너무 생각이 앞서간다고 말하고 싶은가?
학생들이여 솔직하게 말해보자.
두발자유화가 되어 외형적으로 어른스러우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 당연하고 어디라도 가서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숨어서 피워야 하는 담배도 교복이 아닌 사복이면 떳떳하게 피울 수 있고, 행동 자체가 조금은 건방진 자세로 편하게 활보하고 싶고, 학생들이 가서는 안 될 곳이라도 두발을 믿고 편하게 가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에 학생에서 벗어나 학생들을 바라보면 통제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절제가 무엇인지, 왜 절제의 도리가 필요한지 말이다.
이렇게들 말한다.
두발을 자유화 한다고 학생들이 다 나쁘게 되는 것이냐고
학생들이 나쁘게 될까봐 두발을 단정하게 하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절제를 배우고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배우고 인격적인 덕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두발의 차이를 두어 성인과 청소년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솔직히 요즘은 학생들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라고 어른들이 말한다.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몰려있으면 피해서 가고 싶은 정도로 말이다.
학생들이 못된 짓을 해도 나무라지를 못하는 세상이다. 학생들에게 오히려 봉변을 당할까 무서워서 말이다.
두발자유화 된다고 우리가 잘못 되나요? 라고 말한다면 “꼭 잘못 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럼 반대로 “머리가 단정하다고 공부가 안되나요?”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쟎는가
두발을 간섭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라는 학생이고 나이에 따라서 사람이 갖춰야 할 행동이며 생각을 배워주기 위함이다.
통제된 속에서 절제를 배우고, 위아래의 구분에서 공경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꼭 “자유”라는 것에 맞춰서 요구하는 것보다 세상을 살아온 어른들이 “두발제한”을 고집하는 이유가 우리나라의 정서와 우리나라의 예의범절에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해석해 주었으면 한다.
아직은 덜 성숙된 사람들이 혹시라도 “자유”라는 편안함에 그르친 행동이나 사고(思考)를 갖게 될까 어른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수천 년 동안 이어 온 특이한 정서와 예의범절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발자유화” 그것을 굳이 신체적 구속이라고 보는 것보다는 성인과 학생들의 구분하는 외형적 기준이라고 보면 그렇게 기분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 주절주절 -